상해 난징 역사탐방 후기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뜻깊은 해를 맞이해서 대한사랑 한류원형문화 사절단은 일제강점기 우리의 아픈 역사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던 독립운동가 들의 삶의 흔적을 찾기 위해 상해와 남경을 갔다.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역사정신을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전국의 대한사랑 대학생과 예비대학생들이 함께 상해로 출발했다.
1월 8일 오전 10시, 우리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상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 도착해서 상해로 들어가는 길에 들었던 느낌은 화려함이었다. 큰 도로에 엄청나게 많은 차, 높은 빌딩과 특이한 모양의 건물들이 상해의 엄청난 발전을 보여주었다. 상해는 본래 중국 변두리의 어촌이었으나 아편전쟁 이후 강제 개항이 되면서 경제와 문화가 빠르게 발전했다. 상해의 화려하게 빛나는 영광과 번영 속에 굴욕과 고통의 역사가 함께 담겨있다. 서양에게 침략을 당한 아픈 역사가 있는 곳에 대한민국의 미래을 꿈꾸던 이들이 희망을 갖고 들어와 임시정부를 세운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상해에 와서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처음 세워진 이유가 있다. 당시 상해에는 서양의 강대국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은 프랑스의 조계지로 중국의 법이 아닌 프랑스의 법이 적용되던 치외법권 지역으로 일본의 탄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한 상해에는 영국 독일 등 서양 강대국들의 조계지가 있어 다른 나라와 접촉이 쉬웠다는 장점이 있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하고 서양 강대국들의 외교를 위하여 상해로 임시정부의 자리를 정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연장선에서 설립되었다. 3.1운동 이전에는 일제는 무단통치로 우리 민족을 강하게 억압했다. 이에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점점 높아졌고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민족운동이 꾸준히 일어났다. 또한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미국의 닐슨 대통령은 모든 민족들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다. 이런 세계적 분위기는 우리나라의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독립의 큰 희망을 주었고 결국 3.1운동으로 독립의 의지가 폭발하게 된다.
1919년 3월 1일, 수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놀란 일제는 모든 학교 휴교령을 내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학생들은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3.1운동의 열기는 몇 개월이나 지속되어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우리의 독립의지는 점점 높아지게 되었다. 3.1운동으로 높아진 독립의지는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까지 이어지게 된다. 1919년에 총 8개의 임시정부가 있었다. 그 중 실질적인 정부의 역할을 했던 곳이 서울의 한성정부. 상해 임시정부,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였다. 3.1운동 이후 세 개의 임시정부가 하나로 합쳐져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된다. 한성임시정부는 전국의 대표자가 참여하여 대표적 의회 성격을 가졌다. 또한 상해임시정부는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연해주는 무장투장을 통한 독립운동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광복의 큰 희망을 가지고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으나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닐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차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해당되었고 승전국들의 식민지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당시 승전국이던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 또한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강대국들과의 외교는 성과가 거의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에서 들어온 독립자금으로 운영을 했다. 특히 민족종교 보천교에서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에서 임시정부에게 독립자금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지독한 탄압을 했고 국내와 임시정부를 연결했던 연통제가 1~2년만에 파괴되었다. 또한 민족종교 말살정책으로 보천교와 다른 민족종교들을 탄압하며 독립자금이 나오는 근거지를 파괴했고 임시정부의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또한 다른 이념과 생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은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임시정부의 상황이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된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침체된 분위기를 끌어올리지 못하고 1919년 300명에 달했던 임시정부 사람들은 30여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나마 남은 독립운동가들도 상해에서 경제적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를 지켰던 김구 선생님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주위에 있던 한인들에게 밥을 얻어먹으러 다닐 정도였다.
처음 임시정부가 세워진 곳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있었던 임시정부의 자리이다. 임시정부 내부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좁고 초라했다. 김구선생님의 집무실, 숙소처럼 쓰이는 장소 등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장소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좁았다. 좁고 초라한 임시정부 건물을 돌아보며 당시 힘들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지금에 우리 삶이 있기에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임시정부 내부에는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이었다. 임시정부는 민주주의의 기초인 삼권분립 체제를 이루었고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헌장 10개조를 만들었다. 그 중 첫 번째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이다. 이는 지금 대한민국 헌법 1조와 같은 내용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의 뿌리가 임시정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국토는 빼앗겼지만 대한민국의 독립과 그 이후를 준비했던 모습을 보며 생각보다 더 체계적인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월 9일. 둘째 날에 제일 처음으로 간 곳은 홍커우 공원이다. 홍커우 공원은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의 묘와 기념관을 이전하면서 지금은 루쉰 공원으로 불린다. 홍커우 공원은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유명한 장소이다. 1932년.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일왕의 생일과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를 홍커우 공원에서 열었다. 그곳에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투척해 일본군의 수장 수십명을 사살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에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감탄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에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이 상해까지 침략해 들어왔고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에 대한 탄압이 강해지면서 임시정부는 1932년 상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
당시 임시정부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고 일본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에 백범 김구 선생님은 독립운동의 불을 다시 붙이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했고 목숨을 바쳐 의거를 일으킬 사람을 찾고 있었다. 1931년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 건너가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간발의 차로 실패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소식을 접한 윤봉길 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님을 찾아갔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님이 만났던 일화와 서로 의거 직전 시계를 바꾼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홍커우 공원에서 매헌기념비와 매헌기념관을 갔다. 매헌기념비는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장소이고 그 옆에는 매헌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매헌은 윤봉길 의사의 호이다. 매헌은 찬바람을 뚫고 꽃을 피워 세상에 맑은 향기를 가득 퍼뜨리는 매화의 모습을 뜻한다. 윤봉길 의사의 삶,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매화와 닮아있다. 매헌기념관 앞에는 윤봉길 의사의 삶과 홍커우공원 의거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기념관은 총 두 개 층으로 되어있는데 기념관의 크기가 방 하나 정도 크기로 매우 작았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흔적은 너무도 크고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2층에는 윤봉길 의사에 대한 영상이 계속 상영되고 있었다. 1층에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과, 의거 당시 던졌던 도시락과 수통 폭탄 모형, 김구선생님과 바꿨던 시계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윤봉길 의사의 유언의 일부가 적혀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동상 옆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해로 떠나기 전 아내에게 남겼던 ‘장부출가생불환’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독립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돌아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와 뜨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긴 “강보에 싸인 두 병정, 너희가 피가 있고 뼈가 있거든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라”라는 유언에 무한한 감동과 감사함이 몰려왔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만국공묘이다. 만국공묘는 각국의 수많은 외국인 유해가 안장된 공동묘지이다. 이곳에는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과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김인전의 묘지 초석이 자리하고 있다.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의 묘는 처음 정안사 공묘에 안장되어 있다가 1976년 이곳 만국공묘로 옮겨졌고 지금은 국립 현충원에 이장되었다. 만국공묘에 초석이 남아있는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김인전은 모두 독립운동을 하시다 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상해에서 돌아가신 분들이다. 만국공묘 안에는 많은 분들의 외국인 묘비석이 있었고 다섯 분의 묘비를 찾기 위해 한참을 돌아봤다. 가장 안쪽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다섯 분의 묘비석을 찾을 수 있었다.
만국공묘에서 먼저 임시정부가 세워지는데 주춧돌 역할을 하신 신규식 선생님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신 신규식 선생님은 단재 신채호 선생님과 함께 산동 신씨 3대 수재로 불릴만큼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난 분이셨다. 학문에 조예가 깊으셨으나 기울어가는 국권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신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분개하여 자결을 시도하셨으나 다행히 빨리 발견되어 목숨을 건지셨다. 이때 “죽음은 거름 역할을 하는 것, 내 한 몸 거름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여기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시고 독립운동을 하셨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 때 자결시도로 인해 한쪽 눈에 장애가 오면서 애꾸눈이란 별명이 생겼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고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하면서 임시정부가 상해에 자리잡을 수 있는 기초를 닦으셨다. 1922년 서양 강대국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임시정부의 처지와 임시정부가 분열되고 싸우는 모습을 비관하여 25일 동안 단식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신규식 선생님의 말씀 중 많은 공감이 되는 내용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대한의 혼이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춘으로서 많은 책임감을 느낀다.
박은식 선생님은 민족사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59년에 태어나신 박은식 선생님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치신 분이다. 1910년 일본은 우리의 혼을 없애기 위해 20만권의 역사서를 소각한다. 이를 본 박은식 선생님은 “국체는 비록 망했지만 국혼은 소멸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는 말씀을 남기시고 우리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셨다. 망명 후 우리의 역사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여러 역사서를 편찬하고 1915년 우리의 아픈 역사가 담겨있는 한국통사를 편찬하셨다.
한국통사에는 “국유형 사유혼”이라는 옛 구절을 인용한 내용이 나온다. 나라가 몸과 같다면 역사는 혼과 같다는 뜻으로 이는 고려 말 행촌이암의 단군세기 서문에 있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행촌이암 선생님은 원나라에게 국권을 빼앗겼던 당시를 살아가며 고려를 되살리기 위해 온몸을 바치신 분이시다. 공민왕 당시 문하부시중, 지금의 국무총리 자리에서 고려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시고 말년에 벼슬을 내려놓고 강화도에 들어가 국혼을 되살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하셨던 일이 바로 단군세기 책을 편찬한 일이다. 단군세기는 단군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우리의 뿌리 역사를 기록한 소중한 역사서이다.
단군세기의 서문은 “위국지도가 막선어 사기하고 막급어사학은 하야오. 사학이 불명즉 사기가 부진하고 사기각 부진즉 국본이 요의요 정법이 기의니라”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나라를 위하는 도가 먼저 선비의 기개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우리의 역사를 바로찾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라에 역사가 무너지면 선비의 기개를 진작시킬 수 없고 선비의 기개가 부족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나라의 정법이 갈라진다.” 여기서 선비는 지금 우리 청춘들로 바꿔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떨까? 그것은 바로 청춘들의 정신과 기개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청춘들의 정신과 기개를 바르게 기르는 것이 바로 역사정신의 힘이다. 박은식, 신채호, 계연수 선생님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우리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박은식 선생님은 1919년 3.1운동 이후 노인동맹단을 결성하셨다. 노인동맹단은 이름 그대로 대한의 광복을 위해 몸바치고 있는 노인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노인동맹단에 소속되어 있던 강우규 의사는 조선총독부의 2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 저격을 계획하신다. 강우규 의사는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을 통해 처음 한성에 들어올 때 폭탄을 던지셨으나 안타깝게 실패하고 만다. 다음 거사를 준비하셨으나 일경에게 체포되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신 후 사형에 처해지신다. 강우규 의사는 돌아가시기 전 유언으로 당시 청년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지셨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강우규 의사의 이 말씀은 당시 대한의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수많은 청춘들이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게 한다. 또한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청춘들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1월 10일, 셋째 날에는 남경을 돌아봤다. 남경은 일본에게 남경대학살을 당한 우리와 동병상련의 큰 아픔이 있는 장소이다. 일본은 남경에서 45일 동안 30만명을 학살했다. 남경대학살 기념관은 양민 학살이 자행된 만인갱 구덩이 위에 세워졌다.
남경대학살 기념관 외부에서부터 참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에게 희생당하는 모습의 조각상들이 기념관 외부에 세워져 있었다.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 임산부의 죽음, 피난가는 노인과 아이,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 조각상들의 아래에는 영어와 중국어로 짧은 글귀가 세겨져 있었다. 글귀 하나하나가 가슴을 찔러왔다.
기념관 내부를 들어가니 어둡고 넓은 공간이 나왔고 천장에는 마치 별이 떠있는 것 같이 빛나고 있었다. 사방 벽면에 당시 피해자들의 얼굴이 있는 수많은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철로된 앨범크기의 책자에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때의 대학살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여기서 중국이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아픈 역사를 그대로 기록해놓고 이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전시관 안쪽 바닥이 뚫려있어 수많은 유골이 묻혀있던 만인갱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은 한국에서 가본 어떤 곳보다도 실감나게 당시의 아픔을 잘 표현했다. 아픈 역사를 실감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35년간 일제에 점령을 당하며 800만명이 희생을 당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피해를 받았으나 이러한 아픔의 흔적이 그만큼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난징 위안소 박물관이다. 이곳은 박영심 할머니가 일본군 성노예로 있었던 곳으로 당시 성노예 피해를 당하며 임신을 했던 모습의 박영심 할머니의 사진이 남아있다. 일본군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박영심 할머니의 배를 칼로 찔렀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목숨을 건지셨다. 2003년 박영심 할머니가 직접 난징에 오셔서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셨다. 위안부 박물관의 입구에는 박영심 할머니가 찍힌 위안부 사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있었다. 일본의 위안부는 중국, 조선, 일본, 동남아 뿐만 아니라 서양 여성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위안부 패하자만 20만명이었으며 이 중 가족의 품에 돌아간 사람은 2만명 밖에 되지 않았다. 위안소 박물관 안에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동상이 있었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이 당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끝없이 당했던 고통인 것 같아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A동인 메인 전시실 외에도 B, C, D 전시실이 있었다. C전시실에는 용기를 내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시고 법정 투쟁을 펼친 우리나라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축소하기 바쁜 일본의 행태에 화가 난다. 작년 국민대 학생들이 학내 위안부 소녀상 건립 운동을 했으나 학교에서 정치적 동상이란 이유로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도 대학가에 친일파의 동상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당시 나라에 힘이 없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피해자를 기리는 동상 건립 허가를 해주지 않는 상황이 말이 되는가? 지금의 우리 역사 인식이 아직까지 너무도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이 안타깝다. 우리들이 역사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많은 고민이 되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뜻깊은 해의 시작부터 독립운동가들의 흔적과 정신 만나게 되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라는 신규식 선생님의 말씀처럼 대한사랑 한류원형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진정한 대한의 혼이 되어 우리의 역사정신과 원형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